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벌지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연합군]]이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발목이 잡혀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고,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의 방어선을 밀어내는데 실패해 기껏 점령해놓은 항구들을 쓰지 못하게 되자, 결국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진격을 멈춘 덕분에 서부전선은 교착 상태로 돌입하였다. 게다가 [[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 [[벨라루스|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들을 때려잡고 다니던 [[소련군]]도 역시 수백 킬로미터를 진군해왔기 때문에 [[공세종말점|보급 문제와 후방 정리 등의 이유로 진군을 멈춘 상태]]였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성공한 후,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3개월 만에 49개 사단으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사단의 병력도 원래의 절반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 원래의 사단들도, 동부전선에서 갈릴 대로 갈리고서 재편성을 위해 독일 본토와 프랑스에서 쉬다가 다시 동부전선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즉 동부전선에도 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소리다.] 독일이 [[라인 강]]에 세워 놓은 방어선이 연합군의 진격을 어느 정도 막아주었지만, 이 방어선이 뚫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에 [[아돌프 히틀러]]는 그때까지 방어에만 급급했던 독일군 병력을 최대한 집중시켜 [[프랑스 침공|아르덴 지방의 숲을]] 전격적으로 돌파하여 [[벨기에]] 지역의 연합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일련의 반격 작전을 구상하였다. 정확히는 서방 연합군을 최대한 몰아세워서, 서방 연합군이 보급 기지로 삼고 있었던 벨기에의 [[안트베르펀]]을 점령해 버리면 서방 연합군은 전투 불능이 되어 버린다는 것.[* 물론 안트베르펀이 독일군에게 떨어졌다면 서유럽 전선의 보급망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연합군이 유럽에서 물러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사실 노르망디는 물론이거니와 [[용기병 작전]]을 통해 [[마르세유]]의 항만이 뚫리면서 연합군의 유럽 내 보급선은 이미 꽤 안정적인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작전 목표인 안트베르펜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더라도 북프랑스 일대의 연합군에 약간의 혼란을 줄 수는 있었겠지만, 히틀러가 의도한 작전 목적인 프랑스 침공의 재현따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베를린엔 '''[[핵폭탄]]'''이 떨어졌겠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독일군은 프랑스 북부에서 네덜란드에 이르던 항구나 항구 이용에 필수적인 시설 및 하구 등을 직접 파괴하거나 최대한 사수하여 연합군의 항구이용을 거부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붙들고 있던 몇몇 항구들은 독일군이 항복하고 나서야 다시 가동할 수 있었다. 연합군이 [[마켓 가든 작전]]을 통해 네덜란드 강습을 시도한 것도 [[베네룩스 3국]] 연안의 항구 도시들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이 승리를 거두는 바람에 독일군의 방어선이 안정되면서 연합군의 진격은 예정보다 훨씬 둔화됐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연합군이 확보한 안트베르펜은 사실상 유일한 최전방 보급 창구였다. 여기를 잃으면 노르망디에서부터 보급품을 끌고 와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북아프리카 전역|아프리카 군단]]과 비슷한 보급 거리를 달성한다.[* 게다가 이 보급 문제는 [[백년전쟁]]과 과정이 거의 똑같다.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캉 먹고 뭐 먹고 하다가 정신 차려 보니 보급 문제로 항구로 쳐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독일군이 그 뒤 남은 병력을 전부 몰고 [[슐리펜 계획|소련군과 싸운다는 계획]]이었다. 거기다 히틀러는 여러 국가에서 파견한 군대가 이름대로 연합한 [[연합군]]의 특성상 연합군이 각국 수뇌부의 협의를 거치고 조율을 마친 다음에야 부대를 배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는 "기습 공격으로 우위를 장악한 뒤 영미 연합군의 대처가 이루어지지 않는 동안에 전부 섬멸해 버리면 된다"는 히틀러의 망상을 더욱 부추겼다. 하지만 히틀러의 이런 생각과는 달리 서방 연합국은 진작에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연합참모본부(Combined Chiefs of Staff, [[https://en.wikipedia.org/wiki/Combined_Chiefs_of_Staff|CCS]])를 구성하여 효과적인 의사결정으로 전쟁을 지도하고 있었다. 특히 유럽 대륙에 전개된 연합군은 아이젠하워를 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국 원정군 최고 사령부[[https://en.wikipedia.org/wiki/Supreme_Headquarters_Allied_Expeditionary_Force|#]]의 단일 지휘권의 통제를 받았다. 연합국의 수반과 각국 군 수뇌부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현장에서의 권한을 크게 부여했으며 다른 국가의 사령관의 간섭도 거의 없었다. 덕분에 아르덴 대공세에서 아이젠하워는 그의 재량권을 발휘하여 신속하게 독일군에게 대응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의 세계 정세'였다면 각국의 국력이 비등비등하고 각국 정부의 지시도 무시할 수 없으니 연합군 사이에서 이 같은 협의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정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영국]]을 제외한 다른 유럽 국가들은 [[망명정부]] 신세로 전락했고, 영국마저 [[렌드리스|미국의 물자 지원]]에 의지하는 상황이라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강해진 상황이었다.] 이와 같이 연합국의 지휘체계는 그에 상응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조직이 없던 추축국, 그리고 특히 전쟁 말기에 단위 제대 하나 하나의 이동마저도 간섭하고 일일이 통제하려 들었던 히틀러의 모습과는 크게 대조되는 것이었다. 독일군의 가장 큰 문제는 주력 전투 부대인 기갑부대를 움직일 연료의 부족과, 병력과 장비를 어디서 가져오는가 하는 것인데, 이미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독일에서 동원 가능한 남성의 숫자가 바닥이 난 지 오래라서 동부전선의 병력을 빼다가 [[돌려막기]]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이 때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직후 괴벨스의 연설과 함께 최후의 카드로 '''1000만'''을 징발해 동부전선에 투입시켰고, 아르덴 대공세가 시작될 즈음엔 이미 그 병력마저 상당수가 갈려나간 뒤였다. 작전을 위해 준비해야 할 병력의 규모부터 이미 불가능한 문제였던 것이다. 본래 포위섬멸전이라면 적군을 포위하는 아군의 수가 적과 대등하거나 그 이상이어야 했다. 1940년 프랑스 침공 때 동원된 독일군은 거의 400만에 달하는 규모 였고, 출격한 루프트바페의 규모 또한 영프 연합군의 공군을 압도하는 숫자로 프랑스의 제공권을 움켜쥐고 있었다. 44년의 서부전역은 이미 독일 본토까지 수 천대에 달하는 연합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활보하며 제공권을 빼앗은 지 1년이 넘어가는 상황이었고, 프랑스와 벨기에에 전개된 약 200만에 달하는 영미 연합군을 상대로 히틀러가 동원할 수 있는 독일군은 병력의 질마저 뒤처지는 채로 프랑스 침공 때의 10분의 1도 되지 못했다. 이걸 타개하려면 히틀러와 OKW는 동부전선에서 병력을 차출하는 게 아니라, '''아예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전부 끌고와야 했다.''' 텅 빈 동부전선으로 밀고 들어오는 1000만 소련군은 무시한 채로.] 그리고 이 계획을 알게 된 서부전선 총사령관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계급)|원수]]와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는 히틀러의 생각처럼 전황이 낙관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희박했고, 남아 있는 모든 독일군의 전력을 동원한 이 작전이 실패하면 오히려 독일군이 패망한다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개진하였다. 동부전선을 총괄하게 된 [[육군참모총장]] [[하인츠 구데리안]]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반대했고, 여유 병력이 있다면 소련군의 공세를 대비하기 위해 동부전선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룬트슈테트는 안트베르펀은 목표로 하기엔 너무 멀다는 의견을 개진했고, 전후에 '말도 안 되는 작전이다. 우리가 [[뫼즈 강]]에 도달하기만 해도 무릎 꿇고 신에게 감사 드려야 했을 지경'이라고 진술하긴 했지만, 사실 9월에 발터 모델의 B집단군이 마켓 가든 작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아헨 전투에서 분투하는 동안 프랑스 방면에서 무사히 퇴각한 G군집단을 G집단군으로 개편하여 독자적인 공세 계획을 수립하려다가 이를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다. 아르덴 대공세가 '룬트슈테트 대공세'라고 서방에 알려진 것과 달리, 룬트슈테트는 2개월에 걸친 작전 회의에서 히틀러에게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고 참석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참모장인 지크프리트 베스트팔 장군이 대리 참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에서는 이러한 룬트슈테트의 직무유기에 대해서 '모든 것을 거절하고 그렇게도 좋아하는 코냑과 담배, 미스터리 서적만 곁에 둔 채 성 안에 안주했다.' 라고 비판했다. 룬트슈테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부터 줄기차게 휴전을 요구해온 사람이지만 히틀러가 들을 일도 없고 그의 작전에 일일이 간섭해오니 사실상 손을 놓아버렸다. 한편 연합군은 독일군의 병력 손실이 심하여 서부전선에서의 공세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부대가 퍼져 있었고, 수많은 전투를 치른 베테랑들은 후방으로 이동하여 휴식하고 재정비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면서 독일군의 보안 체계가 강화되고 작전에 참여할 대부분의 독일군 부대가 독일 영내에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명령이 유선을 사용하는 전화와 전보로 내려졌으며, 12월 들어서는 도저히 항공 작전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날씨가 악화됐기 때문에 독일군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는 [[발터 모델]]이 르제프 퇴각 작전인 들소 작전에서 이미 성공시켰던 기밀 유지였다. 특히 [[오마 브래들리]]는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방어전의 1인자 발터 모델 원수에게 휘말려 3개월 동안이나 숲과 진흙탕에서 싸우면서도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하며 지크프리트 라인에 봉쇄당했던 터라, "이럴 바에야 차라리 독일군이 서부방벽의 요새선에서 한꺼번에 튀어나와 깨끗하게 한 판 붙는 게 낫겠다." 라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피력해 왔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말이 씨가 되었다.]]''' 게다가 실제로 튀어나온 독일군의 규모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고, 천부적인 전쟁 감각을 갖고 있는 [[조지 S. 패튼]][* 벌지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주요 교전지역은 미 제1군(코트니 하지스 중장)의 구역이었고, 전투 기간 동안 미군의 사상자가 제일 많이 생긴 부대도 제1군이었다. 당시 패튼과 그의 미 제3군은 아르덴 남쪽 너머에서 작전 중이었고 벌지 전투 초기까지만 해도 그와 그의 부대는 벌지 전투의 무대에서 다소 떨어져 있었다. 제1군의 피해가 극심해지고 대응 능력이 감소하자 패튼은 휘하 부대를 제1군 지역에 지원군으로 보냈다. 이 당시 패튼과 제3군은 독일 영내의 자르 지역에 대한 공격(제2차 휘르트겐 숲 전투의 시작일 수도 있다. 1차 전투에서의 주 병력인 제1군은 많은 사상자를 기록했고, 생존자들도 지옥 같은 [[PTSD]]에 시달려야 했다. 패튼의 이 시도는 목표 면에선 독일 본토로의 공격을 목표로 한 1차 전투와 비슷했다)을 시작했고 이것은 벌지 전투의 시작 시점과 날짜가 비슷했다. 독일군의 가용한 자원과 인력이 아르덴 정면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그의 공격은 어렵지 않았으나 벌지 전투의 영향으로 작전이 중지되었고, 한참 전방에 진출했던 부대들은 공격 개시선으로 철수해야 했다.]은 휘하 정보장교의 보고를 받으며 아르덴 방면의 독일군 공세를 거의 정확하게 예측했다. 그와 달리 아르덴 지역에서 공세를 예측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브래들리 휘하의 정보 참모 에드윈 시버트 준장은 해임 조치되었다. 아르덴과 아이펠 방면의 기본적인 정보 분석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코르체니의 자서전에 따르면 스탈린은 독일 내 스파이 집단 '붉은 오케스트라'를 통해 독일이 공세를 취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미군과 영국군이 먼저 베를린에 입성할 게 두려워서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